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 1세(교황) (문단 편집) === 이민족으로부터의 [[로마]] 보호 === > 로마의 수위권이 교회의 단일성과 교회의 신앙과 서구 세계에 기여한 업적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. 민족 대이동 시대에 국가 질서가 전반적으로 와해되고 오랜 제국의 수도가 몰락했을 때, 이 베드로 대성당의 봉사만은 거의 유일하게 흔들리지 않는 반석임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, 어린 서방 민족들은 얼마나 고맙게 여겼던가! 오직 레오만이 앗틸라와 가이서리히를 대항하여 서로마를 보존할 수 있었다. 로마 교좌는 신생 서구 민족들의 혼란과 격동의 시대에 처한 어린 교회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큰 봉사를 했다. 그것도 비단 귀중한 고대의 유산을 보존하는 문화적 봉사일 뿐 아니라, 이 교회들의 건설과 보존을 위한 진정한 사목 봉사였다! 이 시대는 물론 이후에도 가톨릭 교회는 크게 교황직에 힘입어, 간단히 국가에 넘어가지 않고 비잔틴 황제들의 정교(政敎) 합일주의나 게르만 영주들의 교권분리주의에 맞서서 교회의 자유를 보존할 수 있었다. 과연 그것은 교회의 단일성에 기여하는 봉사였다. > ---- > 한스 큉, 《교회란 무엇인가》 173쪽 무엇보다 비(非) 가톨릭 신자들에게까지 이 교황이 알려진 것은 교황의 재위 기간 중 [[훈족]]과 [[반달족]]의 침공을 받았을 때 용감히 나서 로마를 구출하여 [[교황]]의 위엄을 크게 드러낸 것이 유명하기 때문이다. 먼저, 452년 [[훈족]]이 [[서로마]] 제국을 침공하여 마침내 로마까지 이르자, 당시 [[서로마 제국]]의 황제인 [[발렌티니아누스 3세]]는 교황에게 강화 중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. 그리하여 레오 1세는 직접 로마 교외로 나가 [[훈족]]의 왕 [[아틸라]]와 회담하여 그를 말빨로 돌려 보냈는데, [[황금전설]]에 따르면, 무장이고 호위병이고 없이 시종들 몇 명과 함께 [[성직자]]의 차림으로 온 레오 1세의 양 옆에는… [[파일:external/www.wga.hu/4meetin.jpg]] 위의 그림처럼 성 [[베드로]]와 성 [[바오로]]가 칼을 들고 호위하고 있었다. 이 모습을 본 [[아틸라]]가 군을 물렸다 [[카더라]]. 물론 이는 종교적인 전설이고 실제로는 교황이 아틸라와 [[담판]]을 통한 협상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이 주된 정설이다. 일부 학자들은 '재물을 뒤로 슬그머니 찔러 넣으면서 협상했다.'고 본다. 어떤 방법이건 간에 레오 1세는 적장에게 직접 찾아가 손에 피 물들이지 않는 평화적인 외교 방법으로 국가를 지킨 것은 자명하다. 더욱이 이 시절 로마에는 '''이런 걸 앞장서서 할 수 있는 인물조차 없었다'''. 아틸라 또한 451년 [[카탈라우눔 전투]]에서 대패한 후 전세를 회복한 지 얼마 안 되어 전쟁을 일으켰는데, [[아퀼레이아]] 점령전 등으로 물자가 부족했고 전염병이 돌고 식량도 부족했다. 425년에 금 350파운드, 435년에 700파운드, 443년에는 2100파운드를 매년 공물로 요구하고, 따로 금 6천 파운드를 일시불로 넘기라고 요구하고 받아내었으므로 그냥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되지만, 실제 협상 내용은 밝혀진 것이 없다.[* The Rhetoric of Power in Late Antiquity: Religion and Politics in Byzantium By Elizabeth DePalma Digeser, Justin Stephens, Robert M. Frakes 70p, The Pope Vs. Attila the Hun By Charles L. Mee Jr.Ancient Rome: A Military and Political History By Christopher S. Mackay 343p] 훗날, [[성 베드로 대성당]]에 안장된 레오 1세의 석관 위쪽에는 위 장면을 [[대리석]]으로 조각한 [[성화]]가 장식되어 있다. 그리고 455년 이번엔 [[반달족]]이 쳐들어오자, 교황은 또 다시 반달족의 왕 [[가이세리크]]와 회담을 벌였다. 그리하여 로마 시내의 약탈은 막지 못했지만, 로마의 파괴와 시민들의 살육만큼은 막아 내었다. 오직 말빨만으로! 다시 말하자면, '''이 때는 반달족한테 찔러 줄 돈도 없었다.''' [* 사실 이건 가이세리크가 장기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. 딸을 황제에게 시집보내려고 하는데 로마를 불태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] 이때 레오 1세가 반달족의 가이세리크와 맺은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. >1. [[그리스도교]] 교회와 관련 시설ㆍ사람은 죽이지 않는다. >2.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. >3. [[포로]]를 [[고문]]하지 않는다. 이리하여 로마는 그 옛날 자신이 박해하던 그리스도인에게 2번이나 구원을 받은 셈이 되었다. 이 덕분에 로마 시민들은 레오 1세에게 무한한 애정과 충성을 바쳐서, 사실상 로마의 수호자로 받아들여졌고, 이후부터 로마 교황들이 [[아비뇽 유수]] 이전까지 정치 영역에 손을 뻗치면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할 수 있었다. 레오 1세는 반달족의 로마 약탈 이후인 461년 선종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